▶지난호에 이어

그가 44세가 되는 해였던 1971년에는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같은 40대였던 김대중과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대결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은 후보가 되지 못했고 김대중 후보도 본선에서 박정희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김영삼, 김대중 두 김 씨는 박정희 독재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의 빛나는 아이콘이 되었다. 또한 두 사람은 민주화라는 목표를 공유하면서도 평생 양보 없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박정희 사후 “1980년의 봄”에 싹텄던 민주화의 희망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 세력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난 후 1983년, 김영삼은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에 돌입하면서 다시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전두환의 임기가 끝나는 1987년 대선에서, 두 김 씨는 라이벌 의식 때문에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들이 그토록 타도하려고 애써왔던 군부독재 세력의 대표 노태우 후보에게 대통령 자리를 헌납(?)하고 만다. 더구나 김영삼은 대통령에 당선되려면 여당의 후보가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노태우, 김종필 세력과 손을 잡고 결국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제치고 당선된다.


이런 경력을 보면 김영삼은 정치민주화에 올인하였고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와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면서, 김대중과는 협력을 못해 민주화를 늦춘 단점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행적과 대통령 직무 수행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지면 관계로, 1993년부터 5년간 집권한 김영삼 정부의 대표적인 공과를 하나씩만 들어 설명해보자.


김영삼이 아니면 할 수 없었다고 생각되는 주목할 만한 업적은 1993년의 금융실명제다. 김영삼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부정한 돈을 끌어 모았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을 것이고, 김영삼 자신도 대통령이 되기 위해 떳떳하지 못한 돈을 많이 쓰면서 ‘이러다가는 나라가 거덜 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와 해결책을 안다고 해도 개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기득권층의 이익과 반대되는 개혁은 더 그렇다. 금융실명제는 그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보여준 정의감과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 김영삼 정부의 최대의 실패는 임기 말에 IMF 외환위기를 초래한 사실이다. IMF 위기가 대통령 개인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1980년 이후 불어 닥친 세계적인 탈규제 바람이 빚은 집단적 실패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선되기 전의 김영삼을 보면, 정치 이외의 영역에서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특히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이 없었다. 그래서 김영삼은 신자유주의 풍조에 나라의 운명을 맡긴 것이다.


김영삼은 민주화 투쟁의 아이콘이었고 개혁적이기는 해도 진보적이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또 정치에는 9단이었지만 경제에는 9급이었다고 할까? 대통령 재임 중의 공과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윤상 교수

(행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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