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을 자는 바람에 당초 계획해 둔 아침 9시 30분 버스를 못 타게 됐다. 어쩔 수 없이 11시에 있는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계획을 수정했다. 이 때 계획표의 중대한 결점을 발견했다. 가장 많이 걸어야 하는 2일차의 식사 예산이 배정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전날 아낀 예산으로 터미널에서 700원짜리 초코바를 구입했다. 오늘 여행이 끝날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전부다.


교통편도 문제였다. 당초 목적지인 블루로드 B코스 종착점에서 영덕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버스는 오후 4시에 끊긴다. 상당히 이른 시간이다. 차가 없는 여행객들은 첫차를 타고 꼼짝없이 아침부터 B코스를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B코스 완행이 힘들 것 같다는 판단 하에 코스 중간의 경정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기로 한다.


버스를 타고 50여 분을 달려 해맞이 공원에 도착했다. 해맞이공원은 강구면과 축산면의 해안선을 따라 해안 도로변에 조성된 해안형 자연공원이다. 우리 학교 캠퍼스의 1/8 가량 되는 3만평의 공원은 푸른 동해 바다와 어우러져 실제보다 훨씬 더 넓게 느껴졌다. 바다와 하늘의 희미한 경계선을 찾아보고 있는데, 문득 집게발 모양 등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워낙 많은 사진을 봤기 때문인지, 독특하기보다는 익숙한 느낌이었다. 창포말 등대는 이미 영덕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평일임에도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것이 이를 증명했다.


등대 앞에는 ‘해파랑길 시작점’ 표지판이 세워져있고, 왼편으로 이어진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면 블루로드 B코스에 진입할 수 있다. B코스의 이름은 ‘바다와 하늘이 함께 걷는 길’이다. 동해 바다의 푸른 바람을 맞으며 길을 걷다 보면 코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었다. 해맞이공원에서부터 축산항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의 B코스는 소요 시간을 약 5시간으로 예상하는 것이 좋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침침한 하늘은 코스 진입을 주저하게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 갈 수는 없기에 그저 기적처럼 구름이 걷히기를 바라며 코스에 진입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하나, 둘 빗방울이 그치고 햇볕이 내리쬐었다. 천우신조(天佑神助)가 따로 없었다.

B코스는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등대 밑의 절벽에서부터 시작되는 코스는 무성하게 자란 풀숲을 지나 바윗길로 이어졌다. 동해 바다와 만나는 절벽 바윗길은 생각보다 위험했다. 옷이나 신발, 가방 등에도 흠집이 생기기 쉬우므로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특히 크로스백이나 DSLR 가방을 메고 바윗길을 뛰어넘을 땐 아찔한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이 코스를 지날 때는 자연과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파도가 만들어 낸 끝없는 바위 절벽의 절경, 하늘과 경계가 모호해지는 동해안의 탁 트인 지평선을 보며 계속해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쐬고 있으면 자연의 경이로움을 사뭇 느끼게 된다. 과거 몇몇 선비들이 벼슬길을 마다하고 자연 속에서 은신하는 삶을 선택했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될 법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터미널에서 보았던 경정해수욕장이 보인다. B코스의 3/5쯤 되는 지점인 경정리에서 체력의 한계와 극심한 열량 부족을 느끼며 경정3리 정류장으로 향했다. 영덕까지 버스 요금은 2,150원이었다. 준비 계획 부족의 한계가 드러나서 아쉬웠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영덕에서 대구로 가는 버스표를 전재산을 털어 구매한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계획표에 맞게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뿌듯함과 동해 바다가 보여주었던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혼자만의 추억을 갖고 대구터미널에 발도장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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